동북아청년련의회 배구팀》 출생기

2001년 10월의 어느날, 일본에 있는 조선족류학생들이 축구를 맛보자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7명 류학생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르바이트에 언어공부, 대학, 대학원 입시시험때문에 다망한 류학생들에게는 축구란 더없이 사치한 취미였다.

오랜만에 만져보는다감다정한 축구공, 함께 뛰고넘기며 땀흘린뒤에 한껏 굽내는 시원한 맥주마저 열에 끓어 넘쳤다. 하지만 이들이 공감에는 축구의 쾌감뿐이 아니였다. 아르바이트생 신분의 희노애락뿐이 아닌 특히 외국인에 대한 일본사회의 선입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대응이 였다. 그도 그럴것이 재일본 외국인범죄자중에 중국인 범죄가 절반이상이라는 보도가 있었고 세집을 구하려고 해도 일본인 보증인을 필요로 한다며 뒤따르는 거절… 아무튼 부당한 《대접》들로 일구난언이였다.

적극적인 자세로 일본사회에 진입하려는 조선족들에게는 부당한 선입관들이 안타까웠고 이리저리 당하는 《푸대접》이 역심리를 가지게 되였다.

허나 민족의 사명감이 넘쳐나는 열혈청년들로서 이런 현실에 반해 자기네를 대변하는 일을 하고싶었다.

거듭되는 의론끝에 이들은 외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불신의 오해가 계속되는 문제점의 하나가 바로 서로 직접적인 교류가 부족하다는데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가 주동적이고 열정적인 노력과 교류로 우리의 존재를 발신하자”로 입을 모으고 신문보도에서 말하는  “문제거리 외국인”이 아닌 주류사회에서 다채로운 공존사회를 만드는 주요한 요소임을 알려주기로 매듭을 지었다.

이런 전제로 찾은 해법이 바로 “모두가 좋아하는 축구를 교류의 기회로 일본사회와 외국인사회의 플래트홈을 만들자” 였다.

이런 취지로 처음 고안된 회명이 《재일형제협회》였다. 하지만 깊이있는 만남의 과정에서 “국제화 된 일본사회에서 류학생으로 단 조선족이란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의미를 띠여야 한다는 체험으로 초창기의 《재일형제협회》를 《동북아청년련의회》로(이하 동청련) 개명하고2002녀3월에 고고성을 울렸다. 당시 회원이23명이였다.

《동청련》은《동경지역의 동북아시아청년단체로서 세계적인 사회단체와의 문화교류, 우호, 협력, 봉사, 공동발전》을 취지로 하고 《독립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으로 운영하는 비영리성 글로벌청년친선단체》로 성질을 정했으며 공동어는 민족, 국적을 초월하기 위한 일본어를 택했다.

《동청련》은 허운철을 제1임 회장으로 오무송, 김명, 정국, 손성룡, 리진, 김명, 리강철, 안창걸,리정국, 정명남 등으로 신로교체를 하면서 명년이면 벌써15번째 생일을 맞는다.


《동청련》은 매주 주말만 진행되는 회내축구외 사회의 축구경기에도 적극 출전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일본 요꼬하마시에서 조직한 월드컵참가 소조별 《5인조 축구경기》에 중국팀을 대표해 출전하는 영광도 만끽했다.


NPO법인 류학생스포츠교류협회에서 조직하는 《외국인 축구리그(FFL)》, 《재일조선족축구리그》,《동경중국인리그》, NPO법인 일본화교스포츠교류협회에서 주체한 《2015전 세계 철사련맹컵》등 경기까지 빠질세라 용약 참가하였다.


올해는 정명남회장의 감동적인 선동과 젊은 회원들의 가입에 힘입어 《제1차 재일 조선족운동대회》에서 우승을 따냈고 《철사련맹컵(鐵絲聯盟)》에서는 일본지역 준우승을 땄다.



오늘의 《동청련》은 하나의 네트워크로 일본만이 아닌 북경, 상해, 서울, 심수, 연변까지 《동청련》 이 이어져 《형제만남마당》이 갈수록 넓혀지고있다.

축구뿐만은 아니다

《동청련》은 축구만이 아닌2001년, 2005, 2009년에 《재일조선족 국제심포지엄》의 협력단체로 참가했다. 또 2009년까지 천지협회, 쉼터 등 단체,협회와 함께 운동대회, 취직경험교류회, 망년회 등 여러 행사도 조직하였다.

그리고 조선족행사만이 아닌, 세계청년평화회의(WYPS) 일본대회의 협력단체(2004년)로 활약했고 중국, 일본, 한국 클럽축구팀 교류경기(A3컵)때에는 자원봉사자로 두차례 참가하고 동경도시(부)야구청의 청구로 중국에 있던 일본고아 후대들의 일본생활적응을 위해 통역봉사도 담당했다. 《동청련》의 특색은 축구를 떠나서 사회, 경제, 문화 교류에도 공헌하고있다.

《일본경제신문》(2000년), 《중문도보》(2003년), 《무지개》잡지(2006년11월)는 《동청련》의 활동을 보도했고 2012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음력설야회프로에서도 《동청련》을 소개했다.

“기회를 만들면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길이 넓어지며 뭉친 힘은 발전에로 이어진다.”

이는 《동청련》이 십수년간에 다듬어 낸 보귀한 경험이다.

오늘의 《동청련》은 초창기의 7명 멤버들로부터 연인원 200여명의 열혈청년들의 발목을 잡았고 2014년 망년회에 참가한 재일본 멤버들만도 60여명이 됐다. 지난 10월 24일《제1차 동청련컵》축구경기에 신로 멤버팀으로《동청련》의 두개 팀이 참가하였다.

오늘의 《동청련》은 초창기의 류학생 조직뿐만 아니고 일본 주류사회에 진출한 끌끌한 사회조직으로 부상했다.